설교제목 : 부르심에 합당한 삶
설교본문 : 에베소서 4장 1절 ~ 6절
설 교 자 : 한승엽 목사
설교일자 : 2025년 08월 17일
설교영상 :
설교요약 :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보여주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는 1–3장이 ‘복음의 이론’, 4–6장이 ‘복음의 실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엡 4:1). 바울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현장’을 교회로부터 시작합니다. 가정이나 직장보다 먼저, 교회 안에서 성도의 덕과 성품이 훈련되어야 밖에서도 복음이 보입니다.
성도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1. 겸손하게 대해야 합니다 (엡 4:2a)
겸손은 자기비하가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고, 이웃을 높여 내 자리를 낮추는 복음적 태도입니다. 우리는 흔히 겸손을 ‘나를 깎는 말’로 착각합니다. “차린 게 없습니다… 저는 못합니다…” 하지만 복음적 겸손은 이렇습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이 하셨습니다(솔리 데오 글로리아).”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는 나를 깎지 말고 주님을 높이시면 됩니다. 누군가 칭찬할 때 이렇게 답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이 힘 주셔서 감당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품격입니다. 또 서로를 이렇게 높이시기 바랍니다. “장로님이 제 롤모델입니다. 권사님의 미소가 우리 공동체를 살립니다.” 서로가 서로를 높일 때, 나는 가만히 있어도 자연스레 겸손해지고, 결국 예수님만 높아집니다. 겸손의 훈련은 말의 습관에서 시작됩니다. 공로의 주어를 ‘나’에서 ‘주님’로 바꾸시면 됩니다. “제가 했습니다” 대신 “주님이 하셨습니다.” 평가의 시선을 ‘내가’에서 ‘이웃’으로 옮기시면 됩니다. 내 수고보다 타인의 은혜를 먼저 말하시면 됩니다. 비교의 잣대를 내려놓고 은혜의 잣대를 드시기 바랍니다. “저 사람은 왜 저래?”가 아니라 “주님이 그에게도 일하신다”고 얘기하시기 바랍니다. 겸손은 교회를 ‘칭찬 공장’으로 만듭니다. 서로가 서로를 높이는 사이, 교회는 하나님 영광이 보여지는 천국의 전시장이 됩니다. 사람의 공로는 흐려지고, 하나님의 손길만 선명해집니다.
2. 온유함으로 대해야 합니다 (엡 4:2a)
온유는 힘이 없음이 아니라 길들여진 힘입니다. 야생마와 같습니다. 힘은 크지만 훈련되지 않으면 방향이 없습니다. 그런데 훈련자가 손을 얹으면, 그 힘은 목적과 질서를 얻습니다. 온유한 자는 소리 지르지 않습니다. 내공이 있으므로 공격하지 않고, 주님께 길들여졌으므로 자기 힘을 이웃을 살리는 데 씁니다. 교회가 전쟁터가 되는 순간은, “내 말대로 해!”가 부딪히면 싸움이 납니다. 반대로 천국이 되는 길은 “당신의 속도에 맞추겠습니다. 당신의 약점을 내가 덮겠습니다.”라고 할 때입니다. 성도가 서로를 특별히 여기면, 맞추어 주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온유는 상대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특별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먼저 속도를 늦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말을 아끼고, 두 번 듣고 한 번 말하는 것입니다(약 1:19). 먼저 자리를 내주어 보시기 바랍니다. 의견이 충돌하면 “제가 따르겠습니다”를 한 번 더 말해 보는 것입니다. 먼저 칭찬해 보시기 바랍니다. 비판보다 칭찬을 먼저, 공개적 지적보다 사적 권면을 먼저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공동체에 천국의 분위기를 만듭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온유함으로 대하면 교회는 따뜻한 분위기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똑똑한 사람보다 따뜻한 사람 되기).
3. 오래 참고 용납해야 합니다 (엡 4:2b)
바울은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을 부탁합니다. 오래 참음은 ‘성격’이 아니라 훈련입니다. 물 속에서 30초 숨 참던 사람이 1초씩 늘려 5분을 버팁니다. 인내의 폐활량도 훈련으로 커집니다. 도저히 못 참을 때 한 번 더 참는 것, 그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용납’은 문자적으로 ‘품에 베어(임신해) 안는다’는 뜻과 닿아 있습니다. 산모가 40주 동안 생명을 품습니다. 입덧도, 통증도 “생명이 자란다”는 소망으로 견딜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사람도 그렇게 품으라는 것입니다. 아직 미숙한 이웃을 내 안에 임신하듯, 성숙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바로 용납입니다. 오래참고 용납하기 위해 화가 날 때 24시간만 지연해 답하고(잠 15:1). 그 사이 축복기도 3회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불편한 사람의 장점 3가지를 찾아 적고, 하나는 직접 말로 전달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해가 생기면 ①진술 듣기 → ②느낀 점 말하기 → ③해결 제안(“다음엔 이렇게”)으로 마무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인내를 훈련해야 가정과 직장에서도 복음의 인내가 자연스레 나올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못 참는 사람이 세상에서 어떻게 참겠습니까? 인내는 교회에서 연습하시기 바랍니다.
4. 성령의 하나 됨을 지켜야 합니다 (엡 4:3–6, 요 17:21)
바울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주목할 단어는 “지키라(τηρεῖν)”입니다. 하나 되게 해 달라고만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하나로 만드셨으니, 우리는 평안의 끈으로 보전해야 합니다(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전도의 자리 지켜야). 요한복음 17:21에서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교회의 하나 됨은 하나님의 하나 되심을 비추는 창문입니다. 교회가 갈라지면, 세상은 하나이신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교회가 하나되면, 세상은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하나 됨을 지키는 5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직접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소문이 들리면 ‘사실 확인 없이’ 믿지 말고, 당사자에게 정중하게 먼저 확인합니다(마 18:15). 비방·분열·과장을 금하고, 대신 중보기도로 기도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갈등 중에도 예배, 전도, 섬김, 기도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높이는 것입니다. 또한 나누지 말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사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해의 용기를 내보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말고 먼저 가서 화해(마 5:23–24)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창문입니다. 겸손·온유·인내·하나 됨이 많아질수록, 창문은 투명해지고 하나님이 또렷이 보이게 됩니다. “천국이 궁금하면 우리 교회를 보라”고 얘기해줄 수 있는 우리 안산중앙교회를 함께 만들어가야 합니다.
적용 :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시간, 물질, 선택).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3절은 성도를 대하는 태도를 명령합니다. “모든 겸손(ταπεινοφροσύνη)과 온유(πραΰτης)로 하고 오래 참음(μακροθυμία)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ἀνεχόμενοι)하고, 평안의 매는 줄(σύνδεσμος τῆς εἰρήνης)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ἑνότης)을 힘써 지키라”(엡 4:2–3)는 것입니다. 부르심은 신분이고, 합당함은 생활입니다. 신분은 은혜로 받았고, 생활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하나님의 열심에 대한 신뢰, 감사, 찬양).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교회라는 실천의 첫 번째 현장에서, 겸손으로 서로를 높이고 온유로 서로에게 맞추고 오래 참음과 용납으로 품고 성령의 하나 됨을 힘써 지키는 하나님 자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높이고, 서로 맞추고, 품어 드림으로 하나님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창문 같은 우리 안산중앙교회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