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경외하는 가정 (상호 복종)
바울은 사랑 가운데 행하라는 새 언약의 계명을 자녀 양육, 재정, 갈등 해결, 관용, 긍휼, 역경 등의 삶의 모든 분야에 적용했습니다. 결혼 생활에도 적용했습니다. 알고 보면 기혼자를 향한 바울의 가르침은 그가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새 언약의 새 계명에 근거하여 빚어낸 신약 최고의 사례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흥미로운 사실은 가장 오래된 헬라어 사본들에는 “복종하기를”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헬라어 본문에는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주께 하듯’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동사가 없으니 의미가 통하지 않습니다. 자기 남편에게 무엇을 주께 하듯 하라는 말 일까요?
역본에 “복종하기를”이라는 단어가 쓰인 것은 바로 앞 구절에서 그렇게 추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법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동의하듯이 본문에 삽입될 동사는 실제로 앞 구절에 쓰인 ‘복종하다’라는 동사가 맞습니다. 요지는 앞 구절의 동사가 곧 이 구절의 동사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복종하기를”이라는 말에 앞 구절이 없다면 아무도 아내들이 자기 남편에게 무엇을 주께 하듯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내들을 향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복종하다’라는 동사가 등장하는 앞 구절부터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 말씀이 지침이 되어 생활화된 가정으로 우리 가정이 믿음으로 세워진다면 필요한 규율은 몇 개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기꺼이 서로 복종하기로 양쪽 다 결단한다면 해결되지 못할 부부 갈등이 과연 있을까요? 이는 ‘그리스도가 당신을 최우선에 두셨듯이 당신도 다른 사람을 최우선에 두라’는 말의 바울식 표현이었습니다. 이것이 상호 복종의 원리입니다.
확신컨대 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변혁적인 역동적인 관계입니다. ‘복종하다’라는 단어는 우리 문화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종속되거나 다른 이의 권위 밑에 놓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개인의 독립성을 일방적으로 무조건 버리라고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서로가 해야 할 섬김입니다.
“피차 복종하라.”
상호 복종이 되는 관계에서는 양쪽 다 자원해서 상대에게 복종합니다. 상호 복종은 상호가 아닌 한 통하지 않습니다. 양쪽 다 노력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새 언약에 참여하는 이들은 서로 복종하되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해주신 일에 비추어 그리해야 합니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서로 존경하기에 복종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복종을 받을 자격이 없는 ‘서로’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를 예수님이 다락방에서 천명하신 그 역동으로 다시 이끌어 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 각자에게 복종하셔서 우리 죗값을 치르셨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서로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이 우리에게 상호 복종의 동기와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십자가에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믿음의 복된 가정을 점점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늘 복 받으세요 한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