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이 내면의 은혜의 자리에 심겨지려면?
같은 예배당에서 같은 설교를 들었는데, 어떤 분은 한 주가 달라지고 어떤 분은 월요일 아침이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설교의 문제일 때도 있지만, 대개는 그 말씀이 마음의 어느 층에 떨어졌느냐의 문제입니다.
지구에 지표면과 맨틀과 핵이 있듯이 우리 마음에도 지층이 있습니다. 가장 겉은 본능입니다. 배고픔, 졸음, 기분 같은 것들입니다. 본능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하나님도 본문에서 친히 "주리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다만 본능은 늘 무엇인가에 지배받는 층이어서, 말씀이 여기 떨어지면 머물지 못하고 그냥 통과합니다. 예배당에서 마음이 뜨거웠는데 주차장을 나서기 전에 식어 버렸다면 대개 여기입니다.
그다음은 이성입니다. 정보를 모으고 계산하고 판단합니다. 여기까지 온 신앙은 똑똑합니다. 설교 요약도 잘하고 성경 지식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성은 딱 판단까지만 합니다. 아는 것과 변화되는 것은 다릅니다. 모압 평지에 선 2세대도 출애굽 이야기들을 줄줄 외웠을 테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은 감정입니다. 감정은 소중하지만 스스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홍해에서 소고 치며 찬양하던 그 입이 한 달 만에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감정이 좋을 때는 시키지 않은 것까지 섬기다가, 몸이 무겁고 마음이 상하면 꼭 지켜야 할 것도 놓아 버립니다.
그다음은 의지입니다. 결정을 내리는 기관인데, 문제는 이 결정기관 자체가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고백합니다. 반은 하나님께, 반은 애굽에 둔 상태를 우리는 중립이라고 부르지만, 성경은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약 1:8)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답은 의지를 더 쥐어짜는 것이 아닙니다. 결단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결정기관이 아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말씀은 어디에 담겨야 합니까. 자아의 아래, 하나님이 남겨 두신 사랑의 자리를 지나 가장 깊은 은혜의 자리입니다. 이곳이 옥토입니다. 내가 잘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그 칭의의 자리, 거기에 말씀이 심겨야 뿌리를 내립니다. 은혜는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떼어 놓고(딛 2:11-12), 고쳐 쓰는 정도가 아니라 새 자아를 줍니다(고후 5:17).
그러면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 가지만 붙드십시오.
첫째, 오늘 붙잡을 한 구절을 정하십시오. 설교 전체를 기억하려 하면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자카르'는 회상이 아니라 말씀을 붙잡고 오늘 행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 말씀을 몸으로 한 번 옮기십시오. 만나는 감탄하는 음식이 아니라 내 발로 나가서 내 손으로 거두어서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문자 한 통, 전화 한 통, 용서 한 번으로 장막에 있는 VIP를 주섬대사 하시기 바랍니다. 행함이 말씀을 이성에서 은혜의 자리로 내려보냅니다.
셋째, 감정이 아니라 습관의 자리를 하나 만드십시오. 예수님도 새벽에 기도하시고 "습관을 따라"(눅 22:39) 기도의 자리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새벽예배가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내 삶을 지켜주고 인도해 주십니다.
말씀이 마음 깊은 곳에 은혜의 자리에 심긴 성도는 광야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광야가 짧아져서가 아니라, 그 광야에서도 하늘 양식과 위로하심의 만나가 매일 내리기 때문입니다.
하늘 복 받으세요 담임목사 드림.



